<천혜의 비경, 무릉계곡 과 여름 동해안 바닷가 여행>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과 함께
강원도 동해시 소재 두타산 무릉계곡을 트레킹도 하고
장마 후 연일 계속되는 찜통 더위을 식히기 위해
시원한 동해 바닷가를 관광하는 여행을 하기로 했다.
하룻동안 함께 땀 흘리며 친구들과 우정을 다지고자
간편한 등산복 차림으로 새벽 일찍 길을 나섰다.
옛 학우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학창 시절부터 쌓아온
오랜 우정을 다시 되 새기며 지금 보다 더욱 성숙하게 다져
지란지교(芝蘭之交)의 꿈을 가꿀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그간 각자 서로 다른 직업과 생활 환경 속에서 다르게 삶을 살면서 생긴
이질감을 함께하는 여행을 통해 대화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속에
동질성을 되 찾아 더욱 친숙해 짐으로서 외롭지 않는 노년을
보내는데도 적지 않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가 인원을 확인하니 모두 31명(정회원25명, 여성 명예 회원 6명)이 모였다.
이번 여행은 동창회와는 별도로
재경 ‘정기 산악회(회장;지융식)’의 주관 행사이다.
재경 동창 산악회는 매월 한번씩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전체 모임 성격인 ‘정기산악회’ 이외에도 별도로
개인적 시간 사정이나 거주 지역, 친소 관계 등에 따라 따로 모이는
‘금요 산악회’, ‘수시 산악회’, ‘요산 산악회’등 소모임 산악회가 3개나 더 있고
회원들은 누구나 각 모임에 교차 참여할 수 있어 어느 동창회 보다도
산악회 활동이 활발하게 실시되고 있어 노년을 살아가고 있는 동창들이
얼마나 건강 관리와 친구들과 좋은 관계의 교분 유지에
신경 쓰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는 자칫 황량해지기 쉬운 노년을 고적(孤寂)하지 않고
밝고 건강하게 보내기 위해서 무척 바람직한 현상이라 생각 한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친구들을 포함한 여러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원 점검이 끝나고 잠실역에서 산악회가 미리 마련한
대절 관광 버스 편으로 아침 8시 정각에 동해안으로 출발했다.
아침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집행부에서 준비해온
김밥으로 달리는 버스 속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버스 속에서는 평생 동안의 각자 직업이나 취미 활동 등을 통해 축적된
전문 지식을 토대로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만한 상식과 관련한
간략한 전달 교육(?)과 체험담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
장거리 여행이 지리 한 줄 몰랐다.
중간의 문막 휴게소와 강릉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영동고속도로를 숨가쁘게 달려 온 버스가
무릉계곡 입구 매표소에 도착한 건 오전 11시40분경이었다.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하장면, 미로면의 경계에 위치한 두타산은
높이 1,353m로 산과 계곡이 아름다워 소금강이라고도 부른다.
두타산(頭陀山)의 ‘두타(頭陀)’는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오로지 심신을 수련하는 것으로 번뇌의 때를 벗고 인간이 가장 집착하는
의식주의 탐욕을 갖지 않고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을 말한단다.
이 산에 ‘두타’라는 이름을 붙인 배경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산이 깊고 험준해 수도하는 부처님의 고행의 길과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 아닌가 혼자 생각해 볼 뿐이다.
두타산은 청옥산 고적대 등과 함께 태백산맥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으며
산의 신비스러움과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무릉계곡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무릉계곡(武陵溪谷)은 국민관광지 1호로 지정된 계곡으로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무릉계곡’이라는 이름은 옛날 삼척부사 김효원이 신선이 노니는 계곡이라 하여
붙인 이름으로써 중국 최고의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등장하는
무릉도원에서 연유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전체 계곡의 길이는 약 6km 정도가 되나 호암소 에서부터 시작하여
용추폭포까지의 주 관광 코스는 약 4km 정도가 된다.
무릉계곡은 울울창창한 송림과 기암 괴석들이 어우러진 경승들이 많아
무릉반석, 호암소, 학소대, 장군바위, 병풍바위, 발바닥 바위,
선녀탕, 쌍폭포, 용추폭포, 하늘문, 두타산성 등
수 많은 명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삼화사 절에서부터 계곡과 숲길을 따라 용추폭포끼지의 길을
‘용(해) 오름 길’이라 부르는데 정선군 임계를 거쳐 서울로 오르내리던
조상들의 정취가 어려있는 옛길이기도 하다.
숲이 빼곡히 우거진 골짜기를 따라 산길을 더듬어 오르면
기암괴석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계곡의 형태가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어 ‘동해안 제일의 산수’라 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 경관의 백미를 보여 주는 곳이다.
용추폭포까지의 트레킹 코스는
대체로 완만하여 큰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 같은 산행을 즐기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길 주변의 풍광이 빼어나 자연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어 팍팍하고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지친 몸과 마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무릉계곡’은 옛날 내가 가족들과 몇 차례 입구까지 왔다가 다른 지역 여행
시간과 맞지 안거나 날씨 관계(우천)등으로 매번 다음 기회를
기약하면서 코 앞에서 포기해야만 했던 사연이 있는 곳이라
남 다른 감회가 있는 여행지이다.
‘금란정(金蘭亭)’은 한말 유림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자라 한다.
금란정 주변에는 고려 때 ‘동안 거사’ ‘이승휴’가 복숭아 나무 수천 본을
심었으나 뜻하지 않는 산불로 모두 소실되고 없어 졌다고 하는데
이 나무들이 지금껏 살아 있었다면 글자 그대로
무릉도원이 될뻔한 아쉬움이 있다.
무릉계곡은 무릉도원에 걸맞게 옛 시인, 선비, 고승들이 자주 찾아
풍류를 즐기던 경승지로서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석각과 매월당 김시습을 비롯한
많은 시인 묵객들이 다녀간 흔적이 암반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는 등
계곡 곳곳이 옛 선비들의 풍류 공간이자 종교적 수행 처로
역사적, 문화적 가치도 높은 곳이다.
푸르게 빛나는 옥수가 폭포를 이루고 자연이 빚어낸
기암괴석의 비경이 신선을 불러들여 노닐게 하리만치 빼어난
천혜의 도원 무릉 계곡은 정말 아름다웠다.
“난풍훈득유인취(暖風熏得遊人醉)”라
음주 없이도 정녕 취(醉) 할 수 있는 곳이라 했던가?
더 없이 빼어난 풍광을 바라 보노라면 깊은 감흥이 절로 난다.
거대한 암반인 ‘무릉반석(武陵盤石)’은 1,500여명이나 앉을 수 있는 넓은
규모라서 여행객들의 눈길과 발길이 저절로 향 하게 된다.
하나의 흰 돌로 펼쳐져 있는 것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며
주변의 기암 괴석과 함께 하는 자연 절경이 장관을 이룬다.
이미 많은 피서객들이 찾아 들어 옥수가 흐르는 암반 곳곳에 자리를 잡고
발이나 몸 전체를 물에 담그고 더위를 즐기고 있었다.
무릉반석 위에는 이곳을 찾는 삼척부사나 토포사(討捕使)를 포함한
시인 묵객들이 새겨 놓은 기념 명자를 비롯하여
수 많은 석각들이 새겨져 있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남겼다는
“무릉선원(武陵仙源)”(신선이 사는 무릉도원)
“중대천석(中臺泉石)”(샘솟는 너럭바위)
“두타동천(頭陀洞天)”( 번뇌 떨친 별천지)
라는 초서 12자와 신미년(1571년) 한창 봄날에 옥호거사가 썼다는
뜻의 하행방서(下行傍書)로 남겨져 있는
“신미중춘(辛未仲春) 옥호거사서(玉壺居士書)”
라는 글자의 석각은 뛰어난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양사언의 힘있는 글씨는 아주 유연하면서도
그 필치가 용이 춤추는 것 같다고 칭찬들을 아끼지 않고 있다.
반석 위에는 난(蘭)을 쳐 새겨놓은 그림도 있다.
무릉반석 위로 쉼 없이 흘러 내리는 물은 맑기 그지 없었다.
등산화를 벗고 발을 담그면 피로도 싹 풀리고 신선 같은
느낌도 들련만 옛 사람들의 풍류를 미처
제대로 몸으로 느껴볼 겨를도 없이
시간에 쫓겨 눈도장 찍듯 대충 서둘러 보고
산행 들 머리에 있는 ‘삼화사(三和寺)’ 절을 찾아 발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요즈음 같았으면 시인, 묵객 모두가 명문, 명필에 관계없이
환경보호법에 의한 산림 훼손죄(?)로 법적 처리를 받았겠구나 생각하며
혼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걸었다.
찌는 듯한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의 막바지이건만
삼화사를 찾아가는 발걸음은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간다는
설래임이 있어서인지 그런대로 무겁지만은 않았다.
두타산과 청옥산을 병풍 삼아 무릉계곡 초입에 고요하게 자리 잡은
삼화사(三和寺)는 1,40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오래된 사찰이다.
경문왕 4년(864년)에 ‘법일 조사’가 불사를 건립하고
‘삼공(三公)’이라 현판 하였다.
그 후 고려 태조(왕건)가 ‘삼공암’에서 후삼국 통일을 기원 하며
‘세 나라를 하나로 화합시킨 영험 한 절’이라는 뜻으로
절 이름을 ‘삼화사’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사철 푸른 금강송 수림에 둘러 쌓여 여유롭고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띠고 있는 삼화사는 인근의 천은사, 영은사, 지장사 등과
더불어 영동 남부의 가장 중심적인 사찰이다.
임진왜란과 산불로 사찰이 몇 차례 소실되어 중창을 거듭하다가
1977년에 현 위치에 이전 되었다.
현재의 삼화사 가람은 법당의 편액이 대웅전이 아니고 진리의
빛이 가득한 ‘적정 의 세계’라는 뜻의 ‘적광전(寂光殿)’으로 걸었다.
‘중생들 어서 오라’ 며 반긴다..
일주문은 속세와 출가의 경계가 되는 문으로서 모든 중생이
자유롭게 드나든다는 의미에서 문을 달지 않는다.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모든 번뇌를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부처님의 세계로 향한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일주문에 들어서면서 나도 속세의
온갖 근심 걱정을 모두 잊어 볼까나 생각해봤다.
다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천왕문이었다.
우리 일행들은 트레킹만 생각하고 삼화사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일찍 올라 가기 등산 대회를 하는 사람들처럼 사찰 둘러 보기는 생략하고
서둘러 산행만 열심히 하고 있어 평소 여행은
아는 것만큼 만 보게 된다는 생각 때문에
삼화사에 얽혀 있는 옛 내력을 살펴보겠다고 미리 기초 자료를 살펴 보고
길 나섰던 나로서는 절을 둘러보랴 일행을 따라 갈랴 무척 바쁘다.
‘여행은 이런 것이 아닌데’, 혼자 볼멘 소리로 중얼거려 봤다.
카페에 올릴 여행 사진 마련을 위한 지회장과
나와 둘만 천왕문에 들어 섰다.
불법을 수호하고 사악한 악귀를 막기 위해 세운 천왕문 양쪽에는
팔을 걷어 붙이고 눈을 무섭게 부릅뜬
사천왕(四天王)이 중생을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무거운 행장을 풀 듯 잠시 마음을 내려 놓고 사천왕을 올려다 봤다.
‘당신은 큰 죄 지은 것이 없으니
오늘은 마음 놓고 통과해도 좋소’하는 듯 하다.
운치 있는 삼화사 가람 들이 나타난다.
비록 불자는 아니지만 언제나 산사에 오면 많은 가람과 자연의
숲이 함께 어우러져 전해오는 편안함과 엄숙함, 그리고
바람 따라 간간히 울리는 풍경소리가 나에게 왠지 정신적인
안정과 마음의 평정심을 가져다 준다.
삼화사의 본전으로 중심 법당인 적광전(寂光殿)의 팔짝 지붕 모서리는
공포를 돌출시켜 연꽃이 환하게 피어난 느낌을 준다.
절에 오면 나는 언제나 평소 내가 좋아하는 연꽃들이 가람 여기 저기에
새겨져 나를 반기는 듯해서 반갑다.
적광전의 현판과 주련(柱聯)은 근세의 선승 ‘탄허 선사’의
친필을 모사(模寫)한 것이란다.
적광전 법당에서 합장하고 정성으로
예불을 올리고 있는 어느 불심,
기원하는 사연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부디 소원도 이루고 성불하소서...
‘무향각’ 찻집에 들러 가까운 사람과 마주하고 앉아
청아하고 아름다운 산사의 정취와
맑고 향기로운 부처님의 정기를 함께 찻잔에 담아 음미하며
여유 있는 삶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적광전 마당 중앙에는 보물 제1277호인 2개 층의 기단에 3층으로
탑신을 세운 석탑이 자리하고 있고 그 좌우로 심검단과 육화로가
서로 마주보며 위치해 있었다.
3층 석탑은 오랜 풍상을 견디느라 귀 사리가 깎이어 훼손되고
여러 군데 금이 간 채 기나 긴 세월의 흔적을
혼자 감당하며 힘겹게 서 있는듯하다.
인생도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면 저렇게 온몸 여기저기에
생채기를 내며 노쇠해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반백에 눈가의 주름살이 점차 깊어가는 초로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저리어 온다.
가람을 한 바뀌 돌아본 후 해탈과 깨달음을 위해
불도를 닦고 있는 선승들의 세계를 뒤로하고 속인의 본래 인연으로
되 돌아가기 위해 산문을 나선다.
문을 나서는 발길 따라 무릉계곡의 신선은 그 자취를 반석 위에 남기고
삼화사 부처님의 밝은 미소는 두타산 산정에 곱게 피어 오른다.
삼화사에서 나와 조금 오르면 나오는 갈림길에서 대체로 길이
평탄하여 산행하며 걷기 편한 왼쪽 길로 방향을 잡았다.
옥류동을 지나 선녀탕에 이르기 직전에 계곡을 따라 거대한
기암괴석들이 웅장하게 펼쳐진다.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또 다른 바위는 ‘병풍바위’이다.
우뚝 솟은 남성의 기상을 표현하는 듯 수직으로 늘어선 암석들의 조화가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듯한 비경을 연출하며 계곡을 장식하고 있다.
장군바위와 병풍바위의 위용을 올려다 보면서 몇 걸음 더 올라가자
학이 놀았다는‘학소대’가 이어진다
물 줄기가 지나는 바위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하여 ‘학소대(鶴巢臺)라 불렀다 하는데
무릉정공(武陵亭公) 최윤상(崔潤祥)은 무릉구곡가(武陵九曲歌)에서
학소대를 이렇게 시로 읇었다고 한다.
“맑고 시원한 곳에 내 배 띄우니
학 떠 난지 이미 오래되어 대는 비었네.
높은 데 올라 세상사 바라보니
가버린 자 이와 같이 슬픔을 견디나니.”
암석 오른 쪽으로 작은 물 줄기가 4단 폭포의 기암괴석을 타고 쏟아져 내리는데
학소대는 주변 환경이 많이 훼손되고 쏟아지는 수량도 적어
아름다움이 옛 만 못하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학소대 암반 상단 윗 쪽에는 둥지를 떠나
멀리 가버리고 없는 학의 모습을
형상화한 커다란 모형 학 한 쌍이 세워져 옛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목욕하는 선녀들의 모습은 간 곳 없고 수정 같은 깊은 물만
말없이 고여 흐르고 있었다.
계곡 속에 마치 넓은 자연 욕조를 만들어 놓은 듯
신기하게도 양쪽으로 깊이 패인 암벽들에 가려져 선녀들이
몰래 목욕하기에는 안성 맞춤인 형상이다.
두 줄기 물을 뿜어 내는 거대한 ‘쌍폭포’가
위용을 들어 내고 있었다.
쌍폭포는 용추폭포와 함께 무릉계곡 끝머리에 위치해
계곡의 아름다움을 완성하고 있다.
물과 박달고개의 물이 만나서
합수가 되는데 이는 마치 자연에서 음양의 섭리와 순리를 나타내는 듯하다.
쌍폭포를 보노라면 마치 자연 태초의 모습과 아름다움을 보는 것 같다.
지금까지 계곡을 오르며 지친 심신의 피로가
시원한 물줄기와 함께 일시에 날아 가는 듯 하다.
끝이라 할 수 있는 ‘용추폭포’가 있다.
용추폭포는 청옥산에서 부터 각미봉에 이르는 능선 밑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 내리며 떨어지는 폭포로서 깊고 그윽한 맛이 있는 폭포이다.
폭포는 상,중,하 셋으로 된 3단의 단애(斷崖)에서
세 개의 폭포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상탕 과 중탕의 폭포는 긴 세월 동안
쉬지 않고 떨어지는 폭포의 물에 깎이어 항아리 모양으로
작은 소(沼)를 이루고 있고 하단 폭포는 그 둘레가 30여 미터나 되는
깊고 넓은 소(沼)을 이루고 있다.
곧게 내려 쏟아지는 폭포의 물 줄기는 용이 꿈틀거리며 하늘로 날아
오르는 듯 한 장관을 이루며 매우 웅장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무릉계곡의 백미인 용추폭포의 아름다움은
금강산 ‘구곡폭포’에 비견될 정도로 계곡의 으뜸되는 명소이다.
폭포 입구의 암반에는 무릉 반석에서처럼 옛 시인, 묵객들의
암각 글씨들이 음각되어 있다.
이곳 폭포 밑에도 많은 피서객들이 자리를 펴고 앉아 휴식하고 있었다.
신선이 어디 따로 있을까?
저기 앉아 쉬고 있는 저 사람들이 모두가 신선인 것 을…
앞산을 바라다 보면 저 멀리 윤곽이 뚜렷한 다섯 개의 발가락과
발바닥 모양을 지닌 ‘발바닥 바위’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발바닥 바위는 모양이 분명하고 선명하여
만물상 중에도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산꼭대기에 절묘하게 누운
발가락 형상이 너무나 해학적이다.
이 발바닥 바위는 멀리 높은 곳에 자리 하고 있어 누가 미리
알려 주기 전에는 여행객들이 대부분 모르고 지나친다.
온통 싱그러운 나무들로 채운 숲과 기암 괴석들의 진경 산수 풍경들이
계속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계곡 길은 경사가 완만하여 오르기가 그리 힘들지는 않는 산행 코스였건만
나는 여러 곳을 들러 보며 메모하고 사진 찍고 하다 보니 일행들의 보행을
따라 잡기가 쉽지 않아 가슴 턱까지 숨이 차 오르고 쉽게 지쳤다.
몸도 지치고 뙤약볕이 내려 째어 기온이 36도를 넘나드는 한 여름의
찜통 더위 때문에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베낭 가방의 어깨 끈 전체가 땀이 베어 얼룩이 졌다.
길도 많이 가파르고 당초의 우리 일정에 없었던 코스여서
더 둘러 보지 않고 하산 하는 길을 택했다.
마지막 남은 일행 몇 명이
휴식을 위해 자리를 잡았다.
우선 베낭을 내려 놓고 시원한 계곡물로 세수부터 했다.
온몸이 다 시원해오고 기분은 신선이 된 듯 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는데 우리도 둘러 앉아 각자 가져온
베낭 속의 간식을 풀어 놓고 잠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신선들의 놀이터 무릉계곡을 뒤로 하고 나와 매표소 입구에 있는
식당촌에서 산채 비빔밥으로 늦은 중식을 하며
반주도 한 잔씩 곁 들였다.
모두들 배를 채운 우리 일행은 이제부터는 여름 피서 떠나듯
시원한 동해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촛대바위로
유명한 추암 해변 이었다.
동해안의 삼해금강 이라고도
불리 우는 맑은 물과 잘게 부서진
백사장이 아름다운 추암 해변은 한국관광공사가 뽑은
‘한국의 가 볼 만한 곳 10선’에
선정되기도 한 자연 경관이 수려하고
시원한 바닷 바람이 무척 상쾌한 해변이다.
해변에는 많은 피서객들이 찾아 들어 더위를 식히면서 모두들
즐거운 추억 만들기로 한창이었다
모래 사장을 뜨겁게 달구기는 해도
탁 트인 바다, 그리고 한적한 해안에 불어오는 해풍이 청량함을 선사한다.
1시간의 여유를 주고 각자 편한 대로 추암 해변을
둘러 보는 자유 시간이 주어 졌다.
갈아 입고 추암 해수욕장 바다로 뛰어 들었고
또 일부는 야트막한 산 위에 있는 옛 해안 초소를 개조하여 만든
전망대가 있는 언덕에 올라 촛대바위, 형제 바위, 능파대 등의 비경을
내려다 보며 주변 경관을 감상했다.
전망대 앞 그늘에 일렬로 앉아 바다 풍경을 내려다 보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데 멀리 해안에서 무한정 불어 오는 해풍이
그렇게 시원 할 수 가 없었다.
나는 해안쪽으로 내려와 추암 해변을 한 바뀌 돌면서
가까이서 아름다움을 즐겨 봤다.
미묘하게 생긴 해안 절벽과 뽀족히 솟은 크고 작은
바위섬들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동해의 힘차면서도 푸른 물결이 바위를 때리는 여운과
고운 모래로 채운 백사장,
작은 어촌 마을이 함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 무척 아름다운 해변 이다.
조선시대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있던 한명회(韓明澮)는
이 곳의 바위군(群)이 만들어 내는 절경을 가르켜
‘미인의 걸음 걸이’를 뜻하는 ‘능파대(凌波臺) 로 이름 붙였단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식’은
“천길 절벽은 얼음을 치 쌓듯
하늘나라 도끼로 만들었던가
부딛히는 물결은 광류처럼 쏟아지니
해봉이 목욕하는 듯한 이 광경 말로는 못 하겠네
잔잔한 물결은 사전의 시문 같고
거센 파도에서 임승 의 시를 연상케 한다
선계로 가는 길이 훤히 트이었으나
물결이 두려워 갈 수가 없네.”
라고 시로 읇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 내게 하고 있으며
특히 아침 해돋이가 장관을 이루는 해안 비경이다.
예로부터 영동지방의 절경으로 손 꼽혔으며 특히 해돋이 무렵,
솟는 해가 촛대바위에 걸리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해돋이 명소로 각광 받으며 애국가 첫 소절 배경 화면으로 장식되고
인기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
먼 옛날 비바람 사납게 불고 천둥, 번개
무섭게 몰아치던 어느 날.
성난 벼락을 맞고 동강나 없어진 지어미와 소실을 잃고
억겁의 세월을 오가며 비 바람에 씻기고 파랑(波浪)으로 깎아 세워
혼자 우뚝서 있는 촛대바위, 파란 하늘을 담아 물빛도 짙푸른 동해 바다,
추암 해변에 끝없이 이는 파도의 포말,
모두가 장관이고 모두가 경이의 아름다움 그 것이로구나.
행복하다는 생각이 문득 가슴을 파고 든다.
노년의 행복이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마음도 축복이고 행복이다.
노년의 황량함을 떨치고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나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또 다른 행복이다.
동해 팔경 중 제1경인 촛대 바위는 전설에 따르면
추암에 살던 한 남자가 소실을 얻은 뒤 본처와 소실간의 투기가
심해지자 이에 하늘이 벼락을 내려 남자만 남겨 놓았는데
이 때 혼자 남은 형상이 촛대 바위란다.
하늘도 심판을 잘못하셨지.
첩을 둔 행실 나쁜 지아비는 벌하지 않고 투기 조금했다고
조강지처인 지어미만 벌을 하시 다니,
알 수 없지, 수 천 년을 외롭게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혼자 서 있게 한 것도 하늘이 내린
또 다른 형벌이고 후세를 위한 교훈이었는지도 모르지.
촛대바위는 과연 먼저 간 아내에 대한 목 메인 그리움일까?
아니면 벌을 받고 홀로 남아서 고독과 외로움을 견뎌 내야 하는
인고의 아픔일까?
그러나 전설과는 관계없이 실제 촛대바위의 실상은,
능파대 앞 바다 가운데 서 있는 바위로서,
높이는 5~6m쯤 되며 바위가 원래 두 개였으나 그 중 하나가
숙종 7년(1681년) 5월 11일 강원도에 지진이 났을 때
중간부분이 10척 가량 부러져 나가 없어지고
지금과 같이 하나만 남아있단다.
능파대 서쪽에 있는 해암정(海岩亭)은
고려 공민왕 때 삼척 심씨의 시조인
‘심동로’가 명도산에 와서 살면서 지은 정자로서
삼척 심씨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지금의 해암정은 본래의 건물이 소실된 후 조선 중종 25년(1530년)에
어촌(漁村) 심광언이 중건하고 정조 18년(1794년)에 다시 중수 한 것이다.
정자 뒤로 지붕보다 조금 높은 바위산이 있어 운치를 더 해주며
이곳에서 보는 일출도 역시 장관이라 한다.
.
전하는 바에 의하면 현종 때 송시열이 덕원으로
유배되어 가는 도중 이곳에 들러 ‘초합운심경전사(草合雲深逕轉斜)’
(풀은 구름과 어우르고 좁은 길은 비스듬히 돌아든다.)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한없이 밀려오는 해풍에 가슴을 열고 드넓은 동해의 품에 안겨
시원함을 느끼다 보면 모든 시름 잊게 해 준다.
멀리서 뭍으로 밀려와 부셔지는 하얀 파도의 포말도 시원스럽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와 부서지는 싱그러운 포말을 바라 보노라면
바다 풍경이 내 감성을 자극 하여 나이에 걸맞지 않게 소녀 같은
감상에 젖은 기분으로 빠져 들게 한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청마 유치환님은 ‘그리움’에서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며
안타까운 외 사랑의 심정을 노래했고
조병화 시인은 혼자 해변을 걸으며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옛 사랑의 ‘추억’을 가슴 아파했지.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이 겨울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이렇듯 바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이별, 희망과 절망, 젊음과 낭만의 다양한
사연들을 만들어 왔고 또 오늘도 만들고 있고 앞으로도 만들어 가겠지?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서로 맞닿은 수평선을 망연히 바라보며
평소에는 별 감흥 없이 그냥 무덤덤하게 스쳐 지나가던 바다 풍경이
나이 들어 친구들과 함께 하는 여행길에서 보는 지금은
왠지 정말 시원스럽고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역시 살아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추암해변에서 가마솥 같은 여름더위를 잠시 식히고
다시 묵호항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해의 바닷길 관문인 묵호항은 1936년부터 삼척 일대의 무연탄을
실어 나르는 조그마한 항구에서 1976년 대규모 확장공사를 통해 시설을
보강해 오늘에 이른 개항 70여 년이 지난 항구로서 당초 주요 물동량은
석탄과 무연탄, 수산물 등 이였지만 지금은 동해안 제일의
무역항이며 어업기지로 바뀌었다.
묵호등대는 동해시 묵호동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시원한 동해 바다가 한 눈에 들어 오는 절경을 자랑하는 곳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명소이나
저녁 식사 후 상경할 시간이 촉박해 관광은 생략하기로 했다.
분주한 움직임과 불빛들이 장관을 연출하는 곳이지만
당일여정으로 인해 야경의 불빛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공식적으로 계획한 관광 일정을 모두 차질 없이 마친 우리 일행은
여행의 뒷풀이를 위해 묵호 어시장을 찾았다.
비릿한 생선과 바다 내음이 물씬 나는 어시장은
언제나 여행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아침 일찍 어선들이 입항하는 시간을 잘 맞추어 오면 갓 잡아 온
싱싱한 횟감을 살 수 있으며 잡아 온 생선들을
경매하는 풍경도 구경 할 수 있다.
어시장은 상인들의 호객행위, 손님들과 상인들이 흥정하는 소리들로
항상 시끌벅적한 곳이다.
어시장은 사람들의 삶의 박동소리도 듣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다.
그러나 어시장도 늦은 오후 시간이어서 볼거리가 없었다.
어시장의 한 식당에서 오징어 회와 문어를 안주 삼아
소주를 한 잔씩 나누고 매운탕으로 저녁 식사를 하면서
하루 여행의 피로를 푸는 환담의 시간을 가졌다.
식사 후 귀경 하기 위해 저녁 6시 25분에 묵호항을 출발했다.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는 노래자랑이 신나게 벌어졌지만
나는 노래 실력도 신통하지 못하고 평소의 내 성격과도 거리가 있어
그냥 건성으로 들으며 눈을 감고 오늘 하루 여정을 되돌아 봤다.
덥고 피곤하기는 했지만 무척 바쁜 걸음 속에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며 즐겼던 것 같다.
친구들과의 새로운 추억 하나를 더 만들 수 있었던 것
만으로도 행복한 여행이었다
.
또 하나의 나와 또 하나의 삶을 돌아 볼 수 있었던
즐겁고 행복했던 동해안의 계곡과 바다 여행은 이렇게 끝이 났다.
차가 잠실 출발 지점에 다시 도착한 시간은 밤 9시 30분 이었다.
달콤한 휴식 같았던 여행을 마치면서 함께 참가해 준 친구들,
행사준비를 위해 애써준 집행부, 그리고 자발적인 협찬을 선뜻 해준
몇몇 동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
무릉계곡아, 동해야, 또 만나자꾸나. 안녕.
2012.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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